2022-03-25

동정심과 타협

  • 날 짜  : 2022년 3월 25일 금요일
  • 찬  송 :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 성  경 : 요한복음 19:1~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5)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한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사도신경을 통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핍박해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너무나 참혹한 낙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는 이 평가를 바꿀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왜 자기 삶을 바로잡지 못했을까요?

첫째, 동정심이라는 마음의 재료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의 동정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정심은 분명 아름다운 감정이지만, 호의만으로 정의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면, 적당한 관계 유지만 가능할 뿐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동정심의 한계입니다. 또한 동정심은 그저 자신의 도덕성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난 민심에 맞서지는 않았습니다. ‘안됐지만 난 할 만큼 했어.’ 하며 스스로 위안했습니다. 동정심은 생명을 구원해내지 못합니다.

둘째, 타협이라는 잘못된 정치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과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타협을 문제 해결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타협을 성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재판도 없이 때리고 채찍질해 외국인이나 종에게 주는 모욕을 주었습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조롱했습니다. 타협을 위해 처절하게 모욕을 주어 구경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 했으니 더 이상 극단적인 형벌을 요구하지 말아 달라는 타협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잘못 사용한 타협이라는 재료는 결국 진정한 왕을 거짓 왕으로 취급받게 하는 결정적 죄를 만들었습니다.

동정심과 타협을 잘못 사용하면 빌라도처럼 가장 중요한 순간에 주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동정심보다는 진정한 사랑을, 타협보다는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마음의 재료들을 선하게 올바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기도

주님,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재료들을 올바로 사용하게 하옵소서. 빌라도처럼 잘못 사용해 선과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도록 우리에게 지혜와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삶으로 고백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병칠 목사 _ 갈월교회